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난의 행군 (문단 편집) == 설명 == >1995년 봄. [[평양시|평양]]의 공기는 음산했다. > >2월경부터 쌀값이 미치기 시작했다. 1kg에 50원 정도였는데 자고 나면 올라 석 달쯤 뒤엔 230원까지 치솟았다.[* 조금 더 와닿게 이야기를 하자면 2023년 기준 매달 12만 원을 버는데 10kg 쌀(그것도 품질이 낮은) 하나 사면 아예 그 달에 쓸 돈이 없는 셈이다. 여기서 매 달 12만 원도 [[평양직할시|평양]] 시민 기준이고, 당연히 지방은 12만 원은 커녕 몇 만 원이라도 만지면 다행일 수준. '배급제가 있지 않느냐!'라고 할 수 있으나 1990년 당시 배급제는 사실상 유명무실했다. 사실 위의 12만 원은 그냥 1990년 북한 1인당 GDP를 2023년이었을 때로 산출한 것이기 때문에 인민에게 돌아가는 자금이 거의 없는 걸 고려하면 실제 월급이 몇 만 원이면 다행인 것이다.] > >120원쯤 됐을 때 사람들이 "이러다 망하는 거 아니냐"며 술렁거렸다. 200원이 넘었을 때 거리는 축 늘어져 좀비처럼 걸어 다니는 사람들로 넘쳤다. > >[[식인]] 사건 등 범죄 소식이 퍼지며 도시 분위기는 불과 몇 달 만에 흉흉하게 변했다. > >난 1994년 12월 말 기차역에서 만난 [[평안북도|평북]] [[구성시|구성]]의 여인에게서 대량 아사 소식을 처음 들었다. > >군수공장이 밀집한 그곳 [[로동자구]](區)에선 여름부터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기 시작했고 가을쯤부터 굶어 죽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평양에서 불과 100여km 떨어진 곳에서 그런 참사가 벌어지는 줄 몰랐다. 그때 [[북한]]은 그런 곳이었다. > >몇 달 뒤 굶주림은 평양까지 순식간에 삼켰다. 북한 '고난의 행군' 시기를 외부에서는 1995~1998년으로 보지만, 실은 1994년부터 시작됐다. > >아사자 수는 300만 명이라 알려졌지만 난 100만 명 미만으로 추산한다. 300만 명이 굶어 죽을 정도면 어림잡아 1000만 명은 심각한 신체·정신적 장애를 겪어야 했을 것이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이하 생략) >---- >- [[주성하]] 기자의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20&aid=0003098204|회고]]. >[[파일:external/kookbang.dema.mil.kr/BBS_201303070458353660.jpg]] >---- >[[http://kookbang.dema.mil.kr/kookbangWeb/view.do?ntt_writ_date=20130308&parent_no=4&bbs_id=BBSMSTR_000000000004|국방일보]]에 나온 기사의 그림. [[북한이탈주민|탈북자]] [[이애란(요리연구가)|이애란]] 씨가 탈북 후 [[대한민국|한국]]의 한 고급 식당에서 나온 통[[감자]]를 보자 북한에서 먹던 통감자가 생각나, 그때의 [[트라우마]]로 감자에 거부감을 느꼈다는 내용이다. 이 외에도 한 탈북자는 질긴 고기라도 맛있다며 남한 와서 고맙게 여기고 먹는다고 지인들에게 밝힌 바 있는데, 고난의 행군 시절 정말로 썩은 고기라도 먹었던 기억이 있기에 질긴 고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이 시절 지옥을 겪어본 탈북자 증언을 보면 그야말로 입에 넣고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죄다 먹었다는 증언들이 나온다. 그 후유증인지는 몰라도 일부 탈북자들은 과수원에서 농촌 일손 돕기 도중, 심지어 [[가로수]]에 열린 열매만 봐도 따먹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탈북자들이 통분히 여기는 것이 바로 음식물 쓰레기인데 이구동성으로 "북한에는 이런 음식 먹고 싶어도 못 먹는데 이걸 이리도 버리다니..."라고 말을 잇지 못한다. >'''"이런 초대소 시설이나 김정일 패밀리의 생활상은 풍요로운 나라 일본에서 온 나조차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놀라웠다. 그러나, 그들의 성역바깥으로 한 걸음만 나가면 그 날의 끼니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 - 김정일의 요리사이자 최측근 인사였던 [[후지모토 겐지]], [[김정일]]의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일상을 눈으로 직접 보고 서술한 내용이다. 북한에서 1990년대 중후반에 일어난 '3번째' 고난의 행군 시기는 북한의 뒷배와 지원을 해주던 [[소련]]의 [[소련 붕괴|붕괴]]와 [[김일성]], [[김정일]]의 실책에 가까운 3개의 대사업으로 곳간이 텅텅 비어서 서서히 세가 기울어가던 [[북한]]이 완전히 재기불능의 수준으로 망가져버린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은 한국과 달리 경공업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냅다 중공업 우선 경제 정책을 폈으나 정작 첨단 제품을 생산하기엔 기술 수준이 모자라 수입에 의존했다. 그런데 1980년대 중후반 들어서 동구권 붕괴 및 소련 해체와 함께 북한 경제도 이미 쇠락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동구권과 소련은 북한에게 무상 지원과 물물교환 형태의 유상 지원으로 북한에게 석유와 기계 제품 같은 국가 유지에 필수적인 제품을 지원했는데, 소련 해체와 함께 공산권이 사실상 무너지자 북한의 경제 체제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소련이 붕괴하고 탄생한 [[러시아|러시아 연방]]은 제 코가 석 자인 마당에 외화가 부족하여 소련 시절 적대했던 남한에까지 먼저 찾아와 불곰 사업을 통해 빚을 일부 탕감 받기도 할 정도로 절박한 상황이었다. 당연히 기존 외상금도 떼먹은 북한에 달러 현금을 요구했기 때문에 사회 유지에 필수적인 자원과 제품과 부품 공급이 끊겼고, 이후로 추락이 시작되어서 1990년대 중반 필수적인 유지 관리도 못하니 전력, 철도, 제철, 기계, 비료, 화학 산업이 연쇄붕괴하며 경제가 나락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1990년대 후반 [[중국]]산으로 교체하며 어느 정도 극복한다. 고난의 행군 이전에도 북한이 전쟁 이후 초반이라면 몰라도 서서히 남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밀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남한은 경공업을 하면서 산업 기반이 쌓이고 기술력도 쌓이자 [[박정희]] 정부부터 대대적으로 중공업을 시작하였다. 원래는 [[경공업]]에서 시작하여 [[중공업]]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정석이다. 물론 [[중공업]]이야말로 공업의 꽃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지만, 경공업의 기반이 없이 중공업부터 무작정 밀어붙인다면 어떻게 되는지는 [[소련]]이 [[반면교사]]로 잘 보여줬다. [[중국]]이 지금의 경제대국이 된 것도 [[덩샤오핑]] 시절부터 산업 구조를 개편하여 경공업부터 기초 역량을 처음부터 다시 쌓아올린 것과 관련이 깊다. 그 결과 중국은 전세계에 소비재를 공급하는 거대한 공장이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각종 첨단 산업에 투자할 수 있었다. 경공업이 소비재 중심이고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그 [[소비재]]야말로 [[의식주|대중의 삶의 질에 직결되는 것들]]인지라 민간 경제에 이보다 영향을 많이 주는 산업도 없다. 가령 조금이라도 돈을 좀 만져보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명품]] 시장만 하더라도 어느 나라 제품을 많이 구매하는지 몇몇 인기 브랜드를 봐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경공업으로 경험치를 쌓고 기술력을 확보한 다음 중공업을 도입하는 편이 시행착오를 줄이는 데에 훨씬 유리하다. 한국은 이후 [[베트남 전쟁]]과 [[서독]]에 광부, 간호사 파견을 통한 외화벌이 및 해외 원조 등으로 [[한강의 기적]]을 통해 엄청난 경제 발전을 이뤄낸 데다, [[전두환]] 정부부터 준비해 [[노태우]] 정부가 개최한 [[1988 서울 올림픽]]이 서구권 동구권이 전부 참여하는 대박을 친다. 반면 북한이 자랑한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이 삽질과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에 망하고, [[임수경 방북 사건]]을 통해 남한의 경제력이 북한보다 앞서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인민들한테도 알려지는 등 그야말로 정치, 경제, 외교, 문화 등 모든 부문에서 남한에 패배했다는 것이 가시화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다 보니 북한이 1987년부터 그토록 추진했던 제3차 7개년 계획은 목표량을 채우지 못해 실패로 이어진 것이다. 북한측은 이를 타개하고자 1992년 [[라진구역|라진]]-[[선봉구역|선봉]] 무역지대를 만들며 외국인기업법 등 3개 법률을 제정해 제한적 개방을 시도했고, 1994년 완충기 설정 후 경공업과 농업, 무역업을 키우고자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특히 농업은 농업의 ㄴ자도 모르는 김일성이 주도로 만든 [[주체농법]]은 소련의 지원하에 만들어진 대량의 비료가 필수 요건이었는데, 소련이 망하고 나서 지원이 없어지자 주체농법은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산은 민둥산이 되었고 토지는 황폐해졌다. 그러나 [[북한/경제/역사#s-6|이때]]까지만 해도 최소한 배급 제도는 그럭저럭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배급으로 일단 굶어죽지는 않았다. 1980년대부터 산업 생산이 한계에 접어들고 농촌에선 1990년대 초반부터 위기의 조짐이 보이긴 했다. 산골 지역인 [[자강도]], [[량강도]], [[함경도]] 지역은 1991년부터 [[보릿고개]]가 길어지고 작확량이 눈에 띄게 주는 등 위기가 미리 찾아왔다고 한다. 그래도 고난의 행군 이전인 [[1993년]]경까지만 해도 부족하지만 배급이 완전히 끊기지 않았으며 국가도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아무리 발악을 해도 지옥 같은 상황을 숨길 수 없는 [[1995년]]이후의 북한과는 달리, [[1993년]]~[[1994년]] 김일성 사망이전까지는 적어도 외신에 소개되는 평양의 모습은 그럭저럭 한 나라의 수도 수준은 갖추었었다. 당연히 지방이나 못 사는 모습이 나오는 것은 철저하게 막았다. 그러나 고난의 행군은 말 그대로 북한의 사회 체계와 국가 기간 산업 전반을 붕괴시켜 버렸고, 그 영향은 현재 진행형이다. 또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자 김정일은 텃밭에서 자란 작물 소유권을 인정해주다 보니 1980년대 말까지 주로 신선식품류나 쓰다 남은 잡화물을 거래하거나, 아니면 [[8.3 인민소비품]] 같은 부업 벌이를 하거나 여러 [[길거리 음식]]을 사먹는 요식거리하는 곳으로 여겨지던 [[장마당]]은 이 때부터 식량을 살 수 있는 시장으로써 역할과 비중이 커지기 시작했다. 급속한 물가 상승과 배급 중단으로 인해 기본 월급으로 도저히 먹고 살지 못하게 되면서 대다수 주민들은 장마당에서의 부업 벌이에 적극적으로 매달리기 시작했고, 국영 기업들도 장마당을 통해 모자른 자재를 공급 받고 장마당에서의 돈벌이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는데, 1980년대부터 뿌리 내리던 시장 경제가 급속히 발달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장마당을 통해 부자가 된 사람들을 탄압하기 위해 김정일이 화폐 개혁을 진행하면서 때려잡게 된다. 김정은도 종종 비슷한 시도를 한다. 이는 [[북한이탈주민|탈북자]]가 급속도로 늘어나는 결과와 [[꽃제비]]라는 부랑아들을 낳음과 동시에 [[조선로동당|당]]과 [[김정일|수령]]에 대한 실망이 싹트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북한에서 본격적으로 경제적인 의미의 계층 분화가 생긴다. 그 이전부터 있던 [[핵심계층]], [[동요계층]], [[적대계층]] 등은 정치적인 의미의 계층으로 고난의 행군을 통해 생긴 경제적 계층 분화와는 개념 자체가 다르다. 이전에도 평양시내 당 간부와 농촌 지역 사민들의 생활 수준 차이는 극과 극이었지만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며 북한에서는 같은 지역에 사는 주민들 사이에서도 [[빈부격차]]가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동시에 [[화교]]와 [[재일교포]], [[탈북자]]의 가족의 지위도 급속히 상승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외부로부터 자금 도입이 원활한 계층이었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화교들이 북한 경제의 실세이며 [[돈주]]들이다. 성인 화교는 한 달에 한 번 고향에 있는 친척을 방문할 권리가 있는데, 이를 기회로 각종 물건을 트럭 한 대 분량으로 몰고 와서 장마당에 공급하는, 북한 당국도 해결 못하는 경제에 거의 필수적인 무역회사 역할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